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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를 사랑한 파블로 피카소

〈김대유 교수 칼럼〉

피카소를 사랑한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 작품 [무용]

[세종인뉴스 김대유 칼럼니스트] 세상 모든 그림은 선(線)으로 시작된다. 모든 선 위에 색을 입힐 때 화가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하며, 선 위에서 제자리 뛰기를 반복한다. 그 선의 방향과 색칠에 따라 화가들의 화풍은 저마다의 이름을 갖는다.

19세기 후반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으므로 천사를 그릴 수 없다”며 반발한 쿠르베의 사실주의는 때마침 불어 닥친 과학의 시대를 반영했다. 자연 속에서 빛이 주는 생동감을 맞이하며 화폭에 넘실대는 색감의 풍광을 재현한 마네와 모네, 루느아르와 폴세잔은 인상파를 자처했고,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아예 그림 속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불러들였다.

인상주의와 점묘화법은 기술문명의 산물인 튜브물감에 의해 이루어진 화풍이었다. 한동안 주류를 이루던 인상파에 도전장을 내민 앙리 마티스는 강렬하고 대담한 색채를 사용하여 감정 상태를 표현하고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 야수파를 창조해냈다.

파블로 피카소(1881년∽1973년, 스페인)는 화단의 대선배인 마티스를 질투했다. 어떤 그림을 그리든 피카소는 마티스에 견주어 평론되었고 때로 평가절하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경쟁과 발전을 이루었고, 피카소는 마티스를 뛰어넘으려고 노력했다. 아마 마티스가 없었다면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은 주목받지도 못하고 경쟁자들에 의해 땅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화풍은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Art Nouveau)의 등장에 영향을 끼쳤고,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등 건축분야에도 영향력이 교류되었다. 야수파를 견인하고 초현실주의 시대를 열게 한 피카소의 입체파는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19세기와 20세기를 넘나든 대표적인 화풍에 틀림이 없다.

무엇보다 입체파는 오직 피카소만이 그려낼 수 있는 사실상의 1인 화풍이라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과 ‘게르니카’는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깊은 영감(inspiration)을 주는 작품이지 않은가.

세상 모든 관념과 사물, 사람을 사각형의 선으로 도드라지게 표현한 피카소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구나 피카소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순 가득한 그의 진면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피카소는 대체로 그와 함께 살았던 연인들을 대상으로 초상화와 작품을 그렸다. 그와 동거했던 여인들은 모두 7명이었다. 이들 중 2명은 자살하고, 2명은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1명은 젊어서 요절했다.

최근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아인슈타인(지니어스1-10부작)에 이어 파블로 피카소(지니어스2-10부작)를 재검증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바로셀로나 미술학교와 마드리드 왕립미술학교에서 수학했지만 반항적이고 독선적인 성격과 천재적인 고독감으로 인해 자퇴를 거듭했다.

그는 젊은 시절 절친인 카를로스 까사의 총격자살에 충격을 받아 한동안 청색풍의 그림을 그렸다.

우울한 청춘이었다. 첫사랑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서 열애를 했고, 이 때 사창가의 여성들을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사랑의 열기로 인해 그림은 청색을 넘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8년을 동거했지만 항상 외로움을 타던 페르낭드가 외도를 하자 피카소는 그녀를 떠났고, 이어 두 번째 여인 에바를 만나 지극히 사랑했지만 에바는 3년만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36세로 접어든 피카소는 어느 날 러시아의 귀족인 발레리나 올가에게 첫눈에 빠져서 청혼을 하고 결혼했다.

그러나 매사에 의식을 따지는 올가와 부부싸움이 잦았고 10년만에 별거했다. 올가는 이로 인해 심한 우울증과 의부증에 걸려서 죽을 때까지 방황했고, 피카소가 새 여인들과 밀회를 즐기는 곳 마다 나타나 스토킹을 했다.

15세의 마리테레즈는 길거리에서 모델이 되어달라는 피카소에게 넘어갔고 둘 사이에 딸을 두었지만 일생 그림자로 지내야했다.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52세에 목을 매서 자살했다. 1936년 파리에서 만난 사진작가 도라 마르는 7년 동안 동거하며 함께 예술가로서 교감했다. 그녀의 격려로 만들어진 그림이 〈게르니카〉다.

잘 맞는 한쌍이었지만 두사람의 사랑은 도라가 정신분열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1941년 나치 치하의 파리에서 평생의 연인인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이 때 사랑에 넘쳐서 그린 그림이 〈삶의 기쁨 Joie de Vivre〉이다. 둘은 슬하에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두었지만 그녀가 새 연인을 만나 결별을 선언하며 사랑은 막을 내렸다.

이후 피카소는 두 남매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조건으로 프랑수와즈에게 청혼했지만 거절당하자,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34세인 비서 자클린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나이 80세였다. 자클린은 피카소가 임종할 때까지 곁을 지켰고, 그의 사후 13년 후인 1986년 권총 자살을 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피카소는 남성우월주의자로 비쳐질 수 있다. 마초다. 그러나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로 돌아가 보면 부유한 예술가 중에 피카소처럼 연애와 결혼생활 했던 작가는 흔하다. 그를 변호하자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행간을 읽고 싶을 따름이다.

그는 단순히 부유한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오그래픽의 추적에 따르면 그는 워커홀릭(일중독증, work a holic)이다. 키 155센티의 단신이지만 거의 매일 먹지도 자지도 않고 8시간씩 그림을 그렸고, 일생동안 무려 5만 여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 죽기 1년전 90세가 되던 해에만 해도 200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일하다가 죽은 것이다. 유언장을 남기지도 않아서 많은 작품들이 상속자들과 프랑스 정부에게 전달되었다. 기네스북은 그를 화가 중 20세기의 최다 작품자로 기록하고 있다.

경기대학교 김대유 교수

그는 어떤 사람일까?

첫째, 그는 자기애성인격장애자가 아닐까? ‘예술가 피카소’라는 가면을 쓰고 온갖 모순된 자기 행위를 합리화했다. 파블로 피카소는 피카소만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의 예술은 온갖 세상사와 가족사의 한가운데 과연 온전할 수 있었을까?

그는 창녀들에게 모델을 청할 때도 아름다운 여인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여 감동을 주었다. 연애를 할 때마다 밀어를 속삭였고 연인들과 연애만 한 것이 아니라 일과 명성을 공유하기도 했다. 다만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되 그녀들의 바다에 빠져죽지 않았다. 요즘 그저 성과 사랑에 빠져 익사하는 중년남성들은 새겨 볼 대목이다.

둘째,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매사에 잔혹할 정도로 다혈질적인 성격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 성격을 했기에 수모를 무릅쓰고 입체파를 창조했고, 남들이 피난을 갈 때 오히려 독일에게 점령당한 파리로 돌아가 반항적인 일상을 살았다.

나치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비극을 화폭에 담은 ‘게르니카’의 작가로 처형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쓴 그의 행위는 2차 세계대전의 우뚝한 예술혼으로 기록되고 있다.

셋째, 그의 그림은 독해가 어렵고 사기적(詐欺的)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피카소 그림의 각진 선(線)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사각형의 입체에 둘러싸인 스토리텔링을 독해(讀解)할 수 있을 것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터질 듯한 에로티시즘의 슬픈 눈동자와, 세상 어디에 숨을 수도 없는 모순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욕망과 허기, 모순으로 가득 찬 당신의 내면과 마주칠지도 모를 일이다.

칼럼니스트 김대유 교수  dae58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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